온갖 기록
안전가옥 : 장르문학 초심자의 아장아장 SF 입문기 본문
안전가옥에 함께 하기 전, SF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범접할 수없는'이라는 형용사였다. 장르에 대한 내 무지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최애 작품의 세계관이나 그 속의 설정들이 얼마나 그럴듯한지에 대해 반짝이는 눈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니 범인인 제가 어찌 감히..'와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됐다. 그것이 늘 라이브러리 컨시어지에 앉아있는 사람으로서 마음에 걸렸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응원하는 내 마음이 퇴색될까 걱정됐다. 그래서 라이브러리에 있는 장서들의 위치를 얼추 익히게 된 후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야금야금 SF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안전가옥 SNS 채널에 올릴 책을 탐색하며 여러 리뷰와 칼럼들을 들춰보고, 재밌어 보이는 책들을 발견하면 노트 한구석에 적어뒀다가 새 장서를 구입할 때 슬쩍 함께 끼워 넣기도 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 사람들의 눈이 왜 그렇게 빛나고 있었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여전히 넘어질 듯 아장아장 걷는 SF 유아기나 다름없는 수준이지만 이제 막 SF에 눈을 뜨기 시작한 초심자로서 드는 생각이 많아 주절주절 적어본다.
_뜬구름 잡는 이야기도 구체적으로
사실 우주여행이라던가, 외계인과의 첫 만남이라던가, 이런 SF 속 설정들은 (나에게 그랬듯)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때가 많다. 그래서 아마 SF는 아이들이나 보고 읽는 것이라는 편견이 생긴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SF라는 장르는 그 뜬 구름 잡는 이야기를 정말, 놀라울 만큼 구체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에서 작가는 지구의 식민지가 된 달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하는데, 결혼 문화부터 법 제도까지 그 구체적임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디테일에 감탄하다가 그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없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면 작가의 집요함에 미쳤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뜬구름 잡는 설정과 이야기에 완전히 익숙해져 놀라움의 감정이 가시고 나면 그 빈자리는 나의 상상이 채우기 시작한다. 고개 들면 보이는 게 저 달인데, 죽기 전에 달 정도는 갈 수 있지 않을까? 저기 한 번 가보면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될까, 아니면 소설 속 설정처럼 강제 이주가 아니라면 가기 싫은 그런 곳이 될까? 이런 상상들 말이다. SF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정말 '될 것 같이' 표현하고, 그 덕분에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이 훨씬 수월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다. SF 작품을 통해서 우주 비행사나 공학도의 꿈을 키우고 결국 이루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절대적으로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될 것 같은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되지 못할 이유가 뭔가!
_오지도 않은 미래를 열심히, 그리고 잘 만들어보려는 노력
지난 11월 4일, 2017 SF 어워드에 다녀왔다. 만화, 영화, 중단편, 장편, 이렇게 4개 부문으로 나눠 SF 창작물에 대한 시상을 하는 자리였다. 세 시간 남짓했던 시간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장편 부문 심사평이었다. 무대 위에 오른 심사위원장은 듣는 사람을 당황시킬 정도로 수상작들에 대한 단점들을 나열했다. 심지어 세 작품에 대한 평가 이후에는 출품작 전체에 대해 아쉬웠던 부분을 정리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SF 창작자들을 위한 축제와 같은 자리였음에도 그런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자세에서 나는 심사위원들이 가지고 있는 SF에 대한 애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SF의 그럴듯한 뜬구름 잡는 소리를 좋다고 느낀 이유를 알게 됐다.
그분의 말투에는 수상작과 출품작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우리는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는 단호함이 묻어있었다. 오지도 않은 미래나 아직은 실현 불가능한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 SF. 하지만 작가들은 글을 통해 오지 않은 세상을 열심히, 그리고 잘 만들어보려 노력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독자들을 상상하고 꿈꾸게 한다. 그래서 그날 들은 심사평은 나에게 마치 '말도 안 되는 꿈을 다 함께 열심히, 제대로, 잘 꿔보자!'는 뜻으로 들렸다. 해가 갈수록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할 수 있는 일들을 먼저 떠올리게 되고 하고 싶은 이유보다는 할 수 없는 이유를 재 보는데 익숙해진 나에게, 그 메시지는 큰 응원으로 다가왔다. 너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니?라는 말만큼 말도 안 되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_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꿈꿀 수 있도록
SF라는 장르는 그렇게 사람들의 뜬구름 잡는 상상과 꿈을 응원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한 달 동안 접한 SF는 하나같이 재미있었다. 블레이드 러너는 마감시간까지 지나쳐가며 사람들과 토론할 만큼 재밌었고, 저 이승의 선지자는 다 읽고서 나도 모르게 짧은 독후감을 끄적일 만큼 재밌었고, 유년기의 끝은 사람많은 지하철에서조차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을 만큼 재밌다. 재밌으니 그만,이라기보단 재미있어서 더 좋달까.
안전가옥에서도 재밌는 이야기, 많이 읽히는 이야기, 그래서 사람들을 좀 더 자유롭게 꿈꿀 수 있도록 해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면. 그 힘을 받아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될까? 지금으로선 뜬구름 잡는 소리 같지만, 모든 이야기들의 안식처인 안전가옥이니까 이 안에서만큼은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상상해도 괜찮은 걸로.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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