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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 아무 글 : 4. 찰나만이 전부라면

응_그래 2017. 7. 16. 13:49

꽉 쥔 손아귀 속에서 무언가 계속 흐르고 있는 느낌끝나지 않을 것이 끝없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느낌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지독하게 허하다.

 

삶은 그냥 흐르고 있다

내가 밥만 제 때 먹으면아니 밥을 제때 챙겨먹지 않아도 간간히 죽지 않을 만큼 물만 마시면 삶은 그냥 흐를 것이다그게 너무 끔찍하다그냥 흘러가는 것 위에 앉아있는 꼴이라니나는 나의 의지가 단 한 번도 개입된 적 없는 삶을 꽉 쥐고서 그것이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것을빠져나가 그대로 흘러가는 것을 두고만 보고 있다.

 

삶은 하나의 선 같은 것이다선 같다기보다선이라고 믿어지는 것이다선은 수많은 점들로 이루어져있다고 배웠다내가 지금 놓여있는 순간은 그 하나의 점과 같은 것이다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세상에 없는 것과 다름없는 것결국 찰나다이 순간들이 모여서 어떤 선을 이룰 것이라고 믿어지지만 정말 그럴까있는지 없는지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선의 일부라고 자부하며 나는 이 찰나에 몰입해야하는 걸까나는 지나버리면 아무 것도 아닐 순간들을 오지도 않은 결과로 포장하며 자위하고 있다하지만 나의 점이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점 또한 말 그대로 점찰나이다결과 또한 찰나일 뿐인데나는 이렇게 찰나를 위한 찰나들을 살아가고 있다그냥 찰나들의 집합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이 순간 흘러가는 시간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데나는 이상하게 이 시간 속에 빠져서 순간을 영원처럼 여기고만 있다내가 놓여있는 점이 영원히 선의 일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하지만 머리가 아는 것과 달리 내 마음은 나의 점들이 모여 선이 되기를 바라고 있나보다돌이켜보면 나는 줄곧 그랬다사라져버릴 것들을 앞에 두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해하거나 우울해했다그저 끊임없이 순간이 순간이 아니기를 바라온 날들.찰나가 영원이길 바라온 날들멍청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모든 걸 쏟아도 아깝지 않았던 날들.

 

나에게 영원을 약속하던 사람들이 보여준 찰나의 시간들이 있었다나의 모든 문제를 책임져줄 것처럼나의 부족함마저 껴안을 것처럼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인생에 없을 것 같던 말들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하지만 그 순간들은 그냥 점이었다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 순간이 영원처럼선처럼 쭉쭉 뻗어나가기를 바랐던 나의 마음뿐이었다나는 그 마음을 떠올리며 두고두고 울었다.

 

이상하게도 취업준비를 시작하면서 찰나를 붙잡고 있는 나의 모습을 떠올리는 시간들이 늘었다아무렇지도 않게 너도 언젠간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진짜내가하며 반문하곤 했다내가 일을 한다니직업이라는 걸 갖게 될 거라니그 사람들 말로는 내가 지금 과정에 있다고 했다선을 채워가는 과정보이지도 않는 선을채워가는 과정믿을 수가 없었다내가 과정에 있다니나는 과정 속에 있다취업을 준비하면서도 취업을 한 내 스스로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역시나 지금 이 순간을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나보다이 순간이 뚜렷한 선을 만들기를 바라는 만큼나의 삶이 점으로 끝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만큼하지만 이러한 나의 바람과 나는 찰나를 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사이의 괴리만큼나는 괴롭다이 순간을 과정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행복했던 찰나의 환영들을 지나오며 찰나를 찰나로 느끼지 못하는 관성이 내 몸이 배어버렸는지도무지 이 순간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결국 또 다시 순간에 빠져서 찰나와 영원을 헷갈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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