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기록
아무 말, 아무 글 : 4. 찰나만이 전부라면 본문
꽉 쥔 손아귀 속에서 무언가 계속 흐르고 있는 느낌. 끝나지 않을 것이 끝없이 빠져나가는 느낌. 이 느낌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 지독하게 허하다.
삶은 그냥 흐르고 있다.
내가 밥만 제 때 먹으면, 아니 밥을 제때 챙겨먹지 않아도 간간히 죽지 않을 만큼 물만 마시면 삶은 그냥 흐를 것이다. 그게 너무 끔찍하다. 그냥 흘러가는 것 위에 앉아있는 꼴이라니. 나는 나의 의지가 단 한 번도 개입된 적 없는 삶을 꽉 쥐고서 그것이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것을, 빠져나가 그대로 흘러가는 것을 두고만 보고 있다.
삶은 하나의 선 같은 것이다. 선 같다기보다, 선이라고 믿어지는 것이다. 선은 수많은 점들로 이루어져있다고 배웠다. 내가 지금 놓여있는 순간은 그 하나의 점과 같은 것이다.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 세상에 없는 것과 다름없는 것. 결국 찰나다. 이 순간들이 모여서 어떤 선을 이룰 것이라고 믿어지지만 정말 그럴까. 있는지 없는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선의 일부라고 자부하며 나는 이 찰나에 몰입해야하는 걸까. 나는 지나버리면 아무 것도 아닐 순간들을 오지도 않은 결과로 포장하며 자위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점이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점 또한 말 그대로 점, 찰나이다. 결과 또한 찰나일 뿐인데. 나는 이렇게 찰나를 위한 찰나들을 살아가고 있다. 그냥 찰나들의 집합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이 순간 흘러가는 시간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데. 나는 이상하게 이 시간 속에 빠져서 순간을 영원처럼 여기고만 있다. 내가 놓여있는 점이 영원히 선의 일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가 아는 것과 달리 내 마음은 나의 점들이 모여 선이 되기를 바라고 있나보다. 돌이켜보면 나는 줄곧 그랬다. 사라져버릴 것들을 앞에 두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해하거나 우울해했다. 그저 끊임없이 순간이 순간이 아니기를 바라온 날들.찰나가 영원이길 바라온 날들. 멍청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 모든 걸 쏟아도 아깝지 않았던 날들.
나에게 영원을 약속하던 사람들이 보여준 찰나의 시간들이 있었다. 나의 모든 문제를 책임져줄 것처럼, 나의 부족함마저 껴안을 것처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인생에 없을 것 같던 말들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은 그냥 점이었다.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 순간이 영원처럼, 선처럼 쭉쭉 뻗어나가기를 바랐던 나의 마음뿐이었다. 나는 그 마음을 떠올리며 두고두고 울었다.
이상하게도 취업준비를 시작하면서 찰나를 붙잡고 있는 나의 모습을 떠올리는 시간들이 늘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너도 언젠간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진짜? 내가? 하며 반문하곤 했다. 내가 일을 한다니. 직업이라는 걸 갖게 될 거라니. 그 사람들 말로는 내가 지금 과정에 있다고 했다. 선을 채워가는 과정. 보이지도 않는 선을, 채워가는 과정.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과정에 있다니. 나는 과정 속에 있다. 취업을 준비하면서도 취업을 한 내 스스로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역시나 지금 이 순간을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나보다. 이 순간이 뚜렷한 선을 만들기를 바라는 만큼, 나의 삶이 점으로 끝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만큼, 하지만 이러한 나의 바람과 나는 찰나를 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사이의 괴리만큼, 나는 괴롭다. 이 순간을 과정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행복했던 찰나의 환영들을 지나오며 찰나를 찰나로 느끼지 못하는 관성이 내 몸이 배어버렸는지, 도무지 이 순간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결국 또 다시 순간에 빠져서 찰나와 영원을 헷갈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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