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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 진정성을 찾는 인간다움

응_그래 2017. 10. 25. 22:02
_허위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들

연극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속 배경은 빅대디의 생일이다. 온 가족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지만 분위기는 아슬아슬하다. 

가족들은 검진 결과 그가 완전히 건강하다고 빅대디에게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빅대디는 암에 걸렸고 오늘은 빅대디의 마지막 생일이 될 것이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빅대디는 가족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지만 결국 진실을 받아들이고, 며느리 마가렛이 술주정뱅이 남편 브릭을 대신해 선물한 캐시미어 가운을 입는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내는 암으로 인한 통증으로 비명을 지르는 빅대디에게 결국 몰핀을 투여한다.

'이 세상엔 허위 빼면 아무것도 없다!'고 소리치는 빅대디,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에 '그 말이 정말이면 진짜 웃긴다'라고 말하는 빅대디. 그는 주위에 얼마나 많은 허위들이 존재하는지 알고 있고 허위가 역겹다고 말하는 아들 브릭에게 그저 세상이 허위로 가득 차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는 내내 그는 자신의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거짓과, 아들이 선물했다 믿고 싶은 가운과, 몰핀이라는 허상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이런 빅대디의 모습을 매우 인간적이라고 느꼈다. 누가 속이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거짓을 취사선택하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지금의 평온이 영원할 것이라는 허위. 이 사랑만이 진짜일 거라는 허위. 나는 잘 살고 있다는 허위. 극 속에서 '자신은 덜 살아있기'때문에 허위를 역겨워한다고 말하는 브릭처럼 사람들은 살아있기 때문에 허위를 필요로 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비관론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는 이러한 허위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욕망과 본능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의 필요성을 그린다.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외면하기 위해 늘 술에 취한 상태로 살아가는 브릭은 빅대디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인정하고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고 소리친다. 브릭은 자신의 허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좀 더 사람다운 감정에 휩싸일 수 있게 되고 빅대디와 좀 더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브릭이 '허위'에서 벗어난 덕분에 할 수 있었던 대화에서 빅대디는 자신이 곧 죽는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일부러 속은 눈으로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현실, 하지만 허위를 깨고 나오지 않으면 끝내 만날 수 없는 진실. 허위와 진실을 대하는 인간의 양면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_진정성을 고민하는 사람들

로버트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이라는 소설에는 마이크라는 이름을 가진 인공지능 컴퓨터가 등장한다. 마이크는 인간스러운 기계라기보다 기계스러운 인간같이 느껴질 정도로 고도화된 인공지능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줄곧 미국 드라마의 쉘든(이라는 인간 캐릭터)이 떠오를 정도로 귀엽다. 물론 귀여움이 느껴진다는 것조차 인간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지만.

이 소설의 독자들은 마이크가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인간다움의 정의, 그리고 인간의 지능과 만들어진 지능 사이의 경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나를 그런 고민에 빠트린 마이크의 모습들 중 하나가 바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소설 속에서 마이크는 필요에 따라 거짓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적당히 어떤 사실을 숨기기도 한다. 컴퓨터의 역할 그대로 결과의 효용을 저울질 한 결과 '허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이크의 허위는 비록 거짓이긴 해도 공동의 목표에 더 빨리 닿을 수 있도록 해주는 거짓말, 즉 선의의 거짓말이다. 자신이 건강하다는 허위 안에서 마음의 안식과 용기를 찾고자 했던 빅대디를 내가 인간적으로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에 의해 합리화된 거짓말을 하는 마이크의 모습 또한 나에게는 매우 인간답게 느껴졌다.

하지만 마이크가 '진실'을 밝히는 것에 전혀 주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또 다른 인간다움의 요소를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엔 내가 결정한 대로 하는 것이 나았잖아"하는 마이크의 뉘앙스. 그것이 브릭이나 빅대디, 그리고 마이크 사이의 차이다. 진짜 사람이라면 아무리 거짓말의 선의와 필요를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거짓과 허위에는 동요하기 마련이다. 사람은 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한다. 지금의 평온이 영원할 것이라는 허위, 이 사랑만이 진짜일 거라는 허위, 나는 잘 살고 있다는 허위의 뒤에는 진짜 편안함과 진짜 사랑, 진정한 삶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고군분투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답게' 진실과 허상에 대해 고민하기도, 그것에 의지하기도, 그리고 그것이 깨진다는 사실에 매우 약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마이크는 그렇지 않다. 


_그 고군분투가 나에게 주는 위로

나를 위한 허위라는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선의의 거짓말을 욕할 수 있는 것인지, 허위에 둘러싸여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족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은 아직 잘 모르겠다. 게다가 극이 너무 어려워서 이 극이 어떤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한들 나에겐 그것을 읽어낼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 또한 내가 만들거나 누가 만들어준 허위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절망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무대 위 작은 세계만으로 이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 연극이라면, 무대 위 배우들이 보여준 고군분투는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세상의 원리일 것이고, 결국 나 또한 그 고군분투를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세상에 당연하게 존재하는 고군분투이기에 나는 지금 내게 필요한, 내가 원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진정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그 과정에서 오는 괴로움을 겪어내고 있는 것이겠지. 인간답게도 말이다. 어쩌면 이 또한 내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허위일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나의 결론이 너무나도 큰 위로로 다가오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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