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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학과 졸업논문 : 근대 조선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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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학과 졸업논문 : 근대 조선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응_그래 2017. 11. 2. 00:43

프로젝트 소개

- 1920-30년대 근대 조선의 두 신여성 나혜석과 허정숙. 성과 정조 관념을 기준으로 두 여성의 페미니스트적 성향을 비교분석하고, 그 유사성 혹은 차이를 두 사람을 둘러싼 남성사회의 반응과 엮어 재해석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여성을 향한 근대 조선의 가부장사회가 여성에게 적용한 이중잣대를 고발했다. 

- 국사학과 학사 논문. 

- 2016.7. - 2016.12.


왜 했는데?

- 처음엔 단순히 졸업을 위한 마지막 과제라고 생각했던 졸업 논문. 하지만 막상 써야 할 시기가 다가오니, 이왕 할 거면 '제대로'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 내가 쓰는 글이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물론 지금도 유효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시각을 담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여성이라는 소재를 선택했고, 내가 증명하고 싶었던 가설과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주제의식도 마찬가지로 나의 현재적 문제의식에 기반했다. 근대 조선사회의 가부장적 성격을 드러내는 작업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비춰 줄, 거울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랐다. 


뭘 배웠는데?

- 논문은 지금껏 내가 해 온 다른 프로젝트들과 달리, 완전한 개인 작업이었다. 소재 선택부터 자료 조사, 문제의식 도출, 글의 구조 짜기 등 팀웍이었다면 어딘가에 기댈 수 있던 구석도 혼자 힘으로 해결해보는 끈기를 배웠다. 물론 지도 교수님의 도움이 컸지만!

- 문제의식을 논리적으로+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포장을 바탕으로 함께 일하는 동료와 서비스를 구매할 사용자를 설득하는 능력이 기획자의 핵심 역량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논문을 통해 풀고 싶었던 나의 아이디어를 어떻게하면 설득력있게, 재밌게, 매력있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스스로를 보며 나에게 필요한 업의 성격 중 하나를 알게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 당시 논문 지도 수업 담당 교수님은 '좋은 글'에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기로 악명 높은 분이었다. 그래서 겁을 많이 먹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최종 논문 제출 후 추가 수정 없이 최고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실력을 인정받았다기엔 학문적으로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그저 좋은 글을 쓰고 싶었던 나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뿌듯했다.




국사학과를 졸업했지만, 스스로가 딱히 역사학도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사실 역사학도스러운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닌 학교에 같은 학과 친구들을 보며 종종 '아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쟤처럼 못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도 4년 반을 공부한 학문인지라 나한테 이래 저래 큰 영향을 주기는 했다. 그것이 국사학이라서인지, 역사학이라서 인지, 인문학이기 때문이었는지는 역시 모르겠지만 많은 글을 읽고, 그 글을 재고 따져보고, 찾아보고, 다시 읽고, 증명하고, 반박당하고, 이 모든 걸 글과 말로 풀어내는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많이 변했다. 다뤄 볼 거리를 찾는 눈, 그리고 그걸 다뤄보는 방법을 선택하는 방식, 그리고 실제로 풀어가는 법까지. 즉, 내가 생각하는 방식을 정립하는데 나의 전공이 여러모로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많은 면에서 그것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학과공부를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을 고르라면 단연 졸업논문을 완성했던 때가 아닌가 싶다. 


졸업 논문 수강을 예정하고 있던 2016년 가을학기. 그 전 여름 방학부터 나는 많이 쫄아있었다. 학과 수업은 재밌었지만 내가 원래 그렇듯 엄청 좋아하는 하나의 시대나 인물, 분야가 있던건 아니었고, 졸논 수업은 한 번에 패스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나는 졸업을 위해서는 꼭 그 학기에 논문을 완성해야했다.(나름 배수의 진이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나를 단단히 세워 줄 몇 가지 원칙을 세웠더랬다.


: 논문의 큰 외형은 내가 절대 질리지 않을 것으로 선정해야한다. 그래야 버틴다.

: 누가 읽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를 택해야한다. 그래야 쓰는 나도 버틴다. 


이런 마음으로 여름방학부터 (전엔 상상도 못 했던) 도서관 책 엄청 대출하기를 시전했고, 어떤 소재가 내 흥미를 끌 수 있을지 탐색했다. 그리고 결국 선정한 소재는 신여성과 페미니즘. 역사적 서술로 현재의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싶었던 나, 그리고 언제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최적의 소재였다. 그리고 이런 소재라면 (논문도 하나의 기획이라 보았을 때) 흥미로운 기획과 워딩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됐다.


역사학이 흥미로운 이유는 하나의 작은 사건, 인물의 삶, 도구의 사용 등에 대한 조명을 통해 그 시대, 그리고 그 시대를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까지도 다시 돌이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이 신여성의 무언가를 드러냄을 통해 좀 더 거창한 무언가를 밝힐 수 있다면 베스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선정한 세부 소재는 나혜석, 허정숙이라는 두 진영을 대표하는 신여성. 하지만 내가 그 둘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근대 조선의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와 그 시대를 살고 있던 페미니스트들이 조응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조응의 형상이 21세기의 페미니즘과 사회 분위기에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도교수님을 찾아뵙고, 수업시간에 멘탈까지 나가면서 크리틱도 받아가며 고쳐 간 덕분에 글 다운 글이 완성되었고 학점과 칭찬에 야박하기로 유명한 담당 교수님에게 나름 극찬도 받았다.(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허술하기 짝이 없...)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에 내가 이 악물고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이 글이 내가 쓴 학문적인 글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몰라'였다. 결과적으로 졸업학기에는 보고서조차 쓰지 않았으니 지금까지는 맞는 말이긴 하다. 앞 날은 또 모르지만. 




근대 조선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 성과 정조관념을 중심으로 다시 보는 나혜석, 허정숙, 그리고 가부장사회

 

1. 여는 말

 

1920년대 조선 사회에 등장한 신여성은 여성 자신의 인격과 개성에 대한 존중, 자유연애와 자유결혼, 정조에 대한 도전, 남녀평등과 여성 해방 등의 쟁점을 공공의 차원에서 제기하면서 남성이 지배하던 가부장의 조선 사회에 도전하였다. 신여성의 존재는 당시 사회의 여성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 여성사 전체를 두고 보더라도 여성의 인권과 성 해방 진전에 있어 분수령 역할을 하였다. 지금까지 신여성을 다룬 연구들은 대부분 이러한 신여성들의 급진성에 초점을 맞추어 신여성이 던진 주장들의 내용과 의의를 확인하고 그것이 한국 여성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밝히는데 주력을 다해왔다. 따라서 선행연구들은 자유주의 신여성들의 의복이나 화장방식, 그리고 그들의 자유로운 성 의식과 연애관들의 의의를 밝히거나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전에 없던 사회 참여적인 모습들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신여성들의 여성운동이 결국 기득권세력이었던 남성들에 의해 소화되고 수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당시 사회가 신여성들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살펴보는 것은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신여성이 등장한 1920년대는 조선이 근대화의 조류를 받아들이고 식민지 현실 하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근대를 소화하고 있었던 시기다. 동시에 그러한 흐름 속에서 처음으로 여성들에 의해 여성인권과 여성해방에 대한 논의가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따라서 신여성의 존재는 당시 사회가 가장 급진적으로 맞이한 근대적 변화들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이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확인하는 일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남성중심이데올로기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할 것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 각각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신여성 나혜석(1896~1948)과 허정숙(1902~1991)을 성과 정조관념의 측면에서 비교하고 이 둘을 향한 사회의 상이한 반응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조선 사회에서 남성중심이데올로기가 여성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공통적으로 나혜석과 허정숙의 삶 속에 그들이 주장했던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이 체화되어 나타났음을 밝힌 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사회가 나혜석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과 달리 허정숙을 향해서는 지지와 동정의 여론을 보냈음을 확인할 것이다. 이어서 3장에서는 이러한 두 사람을 향한 반응 차이가 허정숙의 의견이 나혜석의 의견에 비해 사회를 설득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허정숙이 가부장사회가 기대하던 바와 상당 부분 조응하고 있었기 때문임을 확인하고자한다.

나혜석과 허정숙은 각각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두 인물이 남긴 여러 자료들과 그들에 대한 선행 연구들은 나혜석과 허정숙의 주장과 삶을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이들은 성과 정조관념의 범주에서 가장 급진적인 주장들을 펼쳤는데, 그 결과 그들의 성과 정조관념에 대한 주장들에 대해 당시 사회의 피드백이 가장 활발하였기 때문에 성과 정조관념이라는 연구 범주는 당시 신여성들의 급진성이 사회에 어떻게 소화되었는지 확인하는데 용이하다. 이 논문은 나혜석과 허정숙의 삶과 주장, 그리고 이 두 인물에 대한 조선 사회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별건곤, 삼천리, 제일선과 같은 잡지에 기고된 글들을 검토하였고, 많은 신여성 관련 선행 연구들을 참고하였다.

2015년 이래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키워드이다. 메갈리아로 대표되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등장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페미니즘 변화에 대한 넓은 스펙트럼의 반응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중에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여성과 남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조차 결국 남성들의 허락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가부장적인 페미니즘 소화 방식을 꼬집는 표현이다. 이 표현 속에는 여권 신장을 향한 여성들의 의지와 그에 대한 사회의 기대, 하지만 페미니즘을 향해 나아가는 여성들이 마주해야만 하는 사회의 이중성과 폭력성이 잘 담겨있다. 이 논문에서는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는 현대의 표현을 빌려 1920년대의 오빠인 가부장사회가 여성운동을 허락한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나혜석과 달리 허정숙이 어떻게 가부장 사회의 허락의 범위 안에 들 수 있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사회주의 신여성들이 당시 사회를 설득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의 실천을 허락받았을 뿐임을 확인하는 이 연구가 신여성들의 업적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남성중심이데올로기의 성격을 확인하고 그 한계를 밝히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작업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나혜석, 허정숙, 그리고 가부장사회

 

1920년대에 등장한 신여성들은 그들이 표방한 바와 스스로를 규정지은 방식에 따라 자유주의 신여성과 사회주의 신여성으로 나뉜다. 두 진영의 신여성들은 공통적으로 가부장적인 관습에 젖어있는 여성을 향한 사회의 억압과 성의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들을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그들은 자유로운 성과 정조 관념을 단순히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삶 안에서 실천으로 옮겼다. 나혜석과 허정숙은 각각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신여성으로 그들의 삶 또한 다른 신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 그 자체라고 여겨질 만큼 급진적이었다.

 

2.1. 자유주의 신여성, 나혜석의 삶

 

나혜석은 결혼 전후에 줄곧 자유연애와 자유결혼, 그리고 자유이혼의 의의를 강조해왔다. 나혜석은 이상적인 결혼을 위한 요건으로 무엇보다도 남녀 서로간의 이해와 사랑을 가장 중시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남녀의 자유로운 교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혜석은 심지어 남녀가 결혼한 이후에도 남녀,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자유로운 교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한 글에서 서양의 가족이 단란한 것은 결코 그 남편이나 아내의 힘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남녀 교제의 자유덕분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는 가족생활에서 남편과 아내는 날마다 조석으로 대면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싫증이 나기 쉽다고 보았는데 남편은 복잡한 사회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아내는 좁은 가정 속에서 날마다 같은 일로만 되풀이하고 있어 아내는 남편의 감정 순환을 이해치 못하고 남편은 아내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녀는 비록 연애 결혼한 남성이라 하더라도 처음은 여자에게 무엇이 있을 듯 하여 호기심을 두던 것이 미구에 그 밑이 드려나 보이고 여자는 그대로 말라붙고 남자는 부절이 사회 훈련을 받아 성장하게 되며 그 결과 가정은 무미건조해지고 권태해진다고 진단하면서 결혼한 여성의 자유로운 교제가 절대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 편의 글 안에서도 이렇게 파격적으로 표출 된 나혜석의 성과 정조관념은 그의 전 생에 걸쳐 글, 그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전달되었다. 더구나 그의 생각들은 단순히 주장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 그의 삶에서도 고스란히 체화되어 드러났다. 나혜석은 결혼 이전인 1914년에 아버지 나기정이 강요하는 결혼을 거부하고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게이오대학생 최승구와 연애하였다. 또한 1916년에 최승구가 결핵 병세의 악화로 인해 사망하게 된 뒤에도 이광수와 잠시 가까워졌다고 전해지는데 나경석의 반대로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지는 못했다. 이처럼 나혜석은 결혼 전에도 자유연애 사상을 실천하는 신여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여러 차례의 자유연애 이후 25살이 되던 1920년에 나혜석은 당시 외교관이었던 김우영과 결혼하였다. 그는 당시의 평범한 여성들과 달리 외교관의 부인으로서 남편을 따라 구미여행을 하고 파리에서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나혜석은 1927년에 파리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에 당시 천교도의 지도자이자 민족지도자였던 최린과의 염문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나혜석은 프랑스에 와 있던 한국 유학생 10여명이 이종우의 방에서 가졌던 최린의 파리입성 환영회에서 그를 처음 만났는데 김우영이 최린에게 나혜석을 부탁하고 베를린으로 떠났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최린과 나혜석이 파리에서 처음 만나는 자리에는 김우영 또한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나혜석과 최린 사이의 관계는 풍문으로만 전해졌다. 하지만 최린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김우영과 이혼한 뒤에 나혜석이 최린을 고소하면서 작성한 고소장에 당시의 정황이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1934년 나혜석이 최린에게 위자료 청구소송을 내면서 쓴 고소장에 의하면 나혜석은 19271120일에 처음으로 최린과 셀렉트 호텔에서 묵었고 그 이후 이들은 수차례 성적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그 이후 1928년에 남편을 따라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나혜석은 최린과의 관계를 정리하였다.

나혜석은 파리 유학을 마치고 김우영과 19개월간 구미 여행을 한 후 남편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그 후 변호사 개업을 위해 서울로 떠난 김우영을 두고 홀로 생활을 꾸려 나갈 방도를 궁리하던 중 최린에게 다시 편지를 하였는데 이 사실이 김우영에게 알려지면서 이혼을 당하게 되었다. 김우영이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하던 당시 이미 그는 서울에서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린 상태였다. 이렇게 1930년에 나혜석은 결국 최린과의 관계로 인해 그의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결혼생활을 끝마치게 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349, 나혜석은 김우영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글로 옮기며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강요되는 정조관념을 비판한 글 이혼고백장을 발표하였는데 이로 인해 큰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2.2. 사회주의 신여성, 허정숙의 삶

 

허정숙은 다른 사회주의 신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여성들의 성 해방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완전한 해방은 계급해방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식민지 지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혀 있는 조선 여성들에게는 성적해방이 필수라고 보았다. 그는 다른 사회주의 신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콜론타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사상은 1920년대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 붉은 사랑삼대의 사랑이 큰 유행을 일으키면서 일본을 통해 조선으로 전파되었다. 콜론타이는 연애와 성욕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조와 혼전순결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콜론타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신여성들은 자신의 자유를 성의 해방에서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허정숙은 조선의 콜론타이스트라고 불렸을 만큼 콜론타이식의 붉은 연애를 실천한 신여성으로 여겨졌다.

나혜석이 본인의 성과 정조관념에 대한 생각을 글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 자체로 드러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허정숙 또한 자신이 소화한 콜론타이즘을 몸소 삶에 옮겼다. 1921년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간 허정숙은 그곳에서 박헌영, 주세죽 등을 만나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받는데 그 과정에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상하이지부 당원으로 활동하던 임권근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19226월 임원근과 박헌영은 국내에 잠입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8개월 복역하고 출옥했는데, 이때 허정숙은 주세죽과 함께 직접 평양으로 가서 두 사람을 마중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허정숙과 임원근은 19242월 서울에서 결성된 신흥청년동맹에 함께 가입하는 등 사상을 함께하는 동지로 함께하였다.

허정숙은 그 이후 1924년 임원근과 결혼하여 같은 해 말 첫아들을 출산했다. 하지만 임원근이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투옥된 후인 1926년 초부터 송봉우와의 염문에 휘말리게 되었다. 결국 그는 19265월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하며 아버지 허헌과 함께 미국으로 일종의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허정숙은 임원근이 구속되기 전에 임신한 둘째 아이를 막 출산한 상태였으나 아이들을 조선에 두고 홀로 유학을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1927년 말 귀국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하던 허정숙은 1929년 감옥에서 나온 송봉우와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그 당시 임원근은 경성형무소에서 여전히 감옥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301월 허정숙은 광주 학생 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게 되었지만 감옥 생활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는 형집행정지를 받아 같은 해 5월에 가석방되었고 그 이후 송봉우와의 관계에서 얻은 아이를 출산했다. 19323월에 출옥한 임원근과 합의 이혼한 허정숙은 임원근이 다른 여성과 재혼할 무렵 송봉우와 동거를 시작했다. 1931년부터 비판지 주간을 하던 송봉우와 함께 자신은 태평광선치료원을 운영하면서 세 아이를 키웠다.

송봉우와의 결혼 생활은 19347월 송봉우가 남경군관학교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이후 파국을 맞았다. 이후 허정숙은 1935년부터 아버지 집에 드나들던 최창익을 만나 중국 망명을 결심하게 되고 1935년 여름 난징으로 가서 한국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37년에 그는 최창익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최창익과의 관계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북으로 들어가면서 끝났다. 시점은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에서부터 이들은 연인이라기보다는 동지로서 함께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1946년 재혼한 최창익의 결혼식장에서 허정숙은 축사를 읽었다. 이처럼 허정숙은 콜론타이의 연애사상, 즉 붉은 연애를 표방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신여성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2.3. 가부장사회의 반응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나혜석과 허정숙은 결혼 전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기존의 성 가치관을 부정하며 자유로운 연애를 하였고 이혼을 경험하였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성과 정조관념을 직접 삶으로 실천하였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두 사람의 진영의 차이를 떠나서 두 사람의 성과 정조관념, 그리고 그것이 체화된 두 사람의 삶이 당시 사회에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두 사람의 삶만 두고 보자면 허정숙은 나혜석보다 더욱 급진적인 연애와 결혼생활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나혜석이 김우영에게 먼저 이혼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정리된 과거 애인과의 관계로 인해 이미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린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던 것에 비해 허정숙은 옥중에 있었던 첫 번째 남편 임원근에게 먼저 이혼을 요구했으며 그 이후에도 두 차례의 결혼생활을 더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 사회가 두 사람을 향해 보였던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우선 나혜석은 종종 인신공격을 포함한 비난을 받을 정도로 무조건적인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이해받지도 못한 채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외면을 받으며 외로운 삶을 살았다. 이러한 외면과 비판은 나혜석 뿐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 신여성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별건곤에 실린 한 대담에서 대담자는 자유주의 신여성인 김원주와 김명순을 연애를 네댓 번씩 하고 결혼을 일 년에 한 번씩은한 명물이라고 조소했다. 그리고 그러고도 무슨 회석 상에 가서 뻔뻔히 의견을 말하고 신문지상에 신 정조관을 발표하고 시 쓰고 문 쓰고 소설 쓰고 기자라고 인력거타고 다니는 것이 웃기다고 냉소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그들을 하나도 동정할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자유주의 신여성들은 사회로부터 냉소와 질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같은 진영의 남성들로부터도 옹호 받지 못했다. 당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실용과 검약의 미덕을 설파하였는데 이러한 입장에서 보았을 때 나혜석을 포함한 자유주의 신여성들은 천박한 아메리카즘의 활동사진이나 보러 다니고 자동차만 타고 다니고 진고개 가서 그림 그린 편지지나 사다 놓고 모양 잘 내고 키스 잘 하는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자유주의 진영 신여성들이 여성의 해방을 위해 주장하는 성과 정조관념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자유주의 신여성들이 여성들의 성 해방을 위해 수단으로써 추구했던 개인의 개성표출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할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신여성들은 여전히 전통과 인습에 사로잡혀 있었던 대다수 여성들의 호응이나 동정을 이끌어 내는 데도 실패하여 같은 여성으로부터도 응원 받지 못하고 철저히 외면당했다.

하지만 허정숙에 대한 반응은 달랐다. 앞서 비교했듯이 나혜석보다도 더 급진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수준으로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을 자신의 삶으로 체화한 허정숙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콜론타이즘, 즉 허정숙이 주장했던 성과 정조관념이 담고 있는 내용 자체에 대한 비판은 있었을지언정 그의 자유분방한 사생활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비판이 없었으며 오히려 허정숙을 향한 긍정과 동정 여론도 존재했다.

초사는 1931년에 잡지 삼천리현대여류사상가들(3) -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공식적으로 허정숙의 성생활을 두둔했다. 그는 허정숙이 추구한 것이 성의 촉수’, 즉 성적 본능을 따른 결정이었는지 아니면 연애라는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였는지 물으면서 만약 그것이 성욕에 따른 결정이었다면 인간의 본능을 이해하는 한에서 오히려 동정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허정숙이 추구한 것이 이성에 따른 연애였다 한들 연애는 사사라는 명제 아래에서 제 3자가 그를 공격할 근거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1932년 잡지 제일선에 기고 된 글 문제인물의 문제 조선의 코론타이스트 허정숙의 필자는 허정숙이 그 이전에도 정조문제로 많이 이야기 거리가 되며 말썽거리가 되어왔는데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은 감옥 간 남편을 기다리지 않고 B에게로 간 것이라고 썼다. 허정숙이 결혼 전에도 자유분방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감옥에 간 남편 임원근을 버리고 송봉우와의 염문설에 휩싸인 것에 대해 특히 사회적으로 의견이 분분함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의 여성, 더욱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파악하고 실제로 그 운동에 나서서 일하는 여성이 과거 봉건시대의 정조관념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주문이라고 설파했다. 즉 허정숙이 임원근을 기다리지 않고 송봉우에게 간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이유를 들었는데, 그 핵심은 남편이 아내의 상전이 아닌 동시에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허정숙이 임원근의 아내이기는 해도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으며 더욱이 성생활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필자는 젊은 허정숙에게 남편이 없으니 송봉우에게 간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되물었다.

뿐 만 아니라 허정숙은 송봉우와의 염문이 돌고 난 후 아버지인 허헌과 유학길에 오를 당시 유학 직전에 낳은 둘째 아들을 모친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때 조선의 어머니와 딸들을 위하여 굳센 일꾼이 될 만한 힘과 길을 찾고 돌아오기를 사회는 기대한다는 평판이 나왔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허정숙을 포함한 사회주의 신여성들에 대한 비난여론이 적었다는 점은 다른 신여성들과 달리 허정숙을 소재로 한 소설이 발간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추측해볼 수 있다.

이처럼 두 사람이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을 몸소 삶으로 체화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혜석과 달리 허정숙은 본인의 삶에 대한 비판을 받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동조나 동정여론을 얻었다. 현재 확인해볼 수 있는 자료는 주로 당시 지식인이라고 여겨졌던 남성들로부터 남겨진 글들뿐이기 때문에 이것이 당시 사회의 전체 의견을 대변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앞서 인용한 허정숙을 옹호하는 두 편의 글의 필자들이 속해있던 진영을 확실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글들이 실렸던 잡지 제일선삼천리의 집필진들이 다수의 자유주의 진영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두 잡지 모두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대중잡지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허정숙을 향한 동조가 단순히 같은 진영에 대한 옹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님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나혜석이 같은 진영의 여러 인사들뿐 만 아니라 같은 여성들, 심지어 가족들로부터 까지 외면 받고 비난당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허정숙을 향한 동조여론의 존재는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3. 신여성의 설득과 가부장사회의 허락

 

앞서 살펴보았듯이 나혜석과 허정숙은 유사한 수준으로 자신들의 성과 정조관념을 몸소 삶으로 체화한 대표적인 신여성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대하는 가부장 사회의 반응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응 차이는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당시 사회가 사회주의 신여성들이 주장하는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의 내용에 설득되고 동의했기 때문에 나혜석과 달리 허정숙의 삶에는 비난을 가하지 않았던 것일까? 우선 허정숙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주장이 당시 사회를 설득하는데 실제로 성공하였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3.1. 신여성의 설득?

 

앞서 나혜석에 비해 허정숙의 사생활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적었고 오히려 허정숙을 동정하고 두둔하는 여론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허정숙이 주장했던 성과 정조관념의 내용 자체에 대해 동의하는 기사나 논평을 찾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허정숙과 같은 진영에 속해있던 사회주의 지식인들조차 남성중심이데올로기에 기반 한 태도로 사회주의 여성들의 정조관념과 콜론타이즘을 평가하고 있었다. 이는 허정숙의 삶을 평가하는 그들의 너그러운 태도가 그들이 결코 허정숙이 주장한 성과 정조관념에 동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주의 신여성들이 당시 사회를 실제로 설득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허정숙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삶 자체에 대한 비난은 적었지만 그들이 표방한 콜론타이즘을 비난하는 논조의 글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콜론타이식 연애관은 동지애적 결합이라는 미명 하에 성적 방종을 정당화시키고 결국에는 동물적인 육체 탐닉을 옹호하는 연애론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평가받았다. 당시 사회의 시선에서 콜론타이즘은 대담한 성적 자유의 실천이라고 허울 좋게 말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성욕을 동지에게 평균히 분배하는 난혼의 논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콜론타이즘은 인간의 동물화, 혹은 일처다부나 일부다처적인 사상이라고 비판받을 정도였다.

이러한 콜론타이즘에 대한 가부장사회의 우려와 비판적인 인식은 콜론타이 사상의 수입 양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콜론타이즘은 1920년대 이후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전파되었는데 그것이 여성의 성 해방과 관련된 내용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논의들은 오히려 남성들 사이에서 더욱 활발하였다. 그들은 콜론타이즘이 표방하는 성적 자유가 정조를 경외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변호하며 사회주의적 연애를 두둔하거나 혹은 콜론타이의 이론이 사실은 연애 같은 사적인 일보다 혁명과 같은 대의에 여성들을 복무시키려는 의도를 담은 논의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들은 애초에 콜론타이가 문제제기했던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이상적인 이성애관계라든가 여성의 사회진출 방식에 대한 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조선의 남성들은 콜론타이즘에 영향을 받은 여성들이 성적 방종으로 흐르게 될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이를 연애와 같은 사적인 임무보다 공적인 임무 수행을 위한 이론으로 강조하는 등 콜론타이즘을 매우 보수적인 방향으로 수용하였다. 즉 콜론타이즘은 이것이 처음 수용되던 과정부터 조선의 남성들로부터 그 핵심 내용을 지지받지 못했으며 콜론타이가 이야기한 여성의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은 남성들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축소되고 가려져야만 했던 대상이었다.

당시 남성들이 남긴 여러 글들을 통해서도 그들이 사회주의 신여성이 주장한 성과 정조관념에 동의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2년에 윤형식은 당시 에 유행하는 연애의 유형을 분류하면서 일정한 갈피를 찾지 못하고 전통 봉건사상에 의한 노예 관념을 그대로 사수하고 있는 경우,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자유사상에 의한 연애지상주의에 기울어진 경우와 함께 콜론타이즘에 물들어 무원칙의 절조 없는 성의 방종으로 흐르는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당시 남성들의 시선에서 나혜석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신여성들의 자유연애 사상만큼이나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콜론타이즘이 부정적으로 인식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윤형식이 콜론타이즘 연애의 부정적인 측면을 성의 방종으로 꼽았던 것은 당시 남성들이 콜론타이가 여성들에게 붉은 연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목적과 이유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음 시사한다. 당시 사회의 시선에서 콜론타이즘은 정절이라는 가치를 위협하는 연애론일 뿐이었다.

또한 허정숙의 두 번째 남편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송봉우는 남편이 옥중에 있을 때 아내가 보여야 하는 태도에 대하여 벌어진 논쟁에서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기도 하였다. 송봉우는 정조를 절대 사수하라!라는 글에서 여성 사회주의자에게 동지로서 사랑과 믿음이 병행하는 여성으로서의 미덕을 강조했다. 그는 이상과 실제의 두 측면에서 이 문제를 논하는데 이상으로 보면 남편이 투옥되었거나 또는 잠적, 망명 중일지라도 그 남편에 대하여 믿음 있는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여성은 정조를 지키면서 남편과의 재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송봉우는 생리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여성은 어디까지든 정조를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정조를 지키지 못하는 여성을 인격의 긍지와 수양이 없유녀형의 아내로 평가절하 했다. 이처럼 송봉우에게는 아무리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정조는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가치였다. 그가 허정숙과 연애할 당시 허정숙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임원근이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내용은 송봉우 자신의 행동과 큰 괴리를 보이는 지점이다.

뿐만 아니라 허정숙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마저 당시에는 밝히지 못했던 허정숙의 사생활에 대한 생각을 시간이 지난 후 왜곡된 시선으로 회고하기도 하였다. 고려 공산당과 조선민족혁명단 등에서 민족 해방 운동에 참가하고 해방 이후 근로인민당 등에서 활동한 혁신계 인사 장건상은 허정숙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허정숙이가 조선독립동맹의 간부인 최창익의 부인 아닙니까? 내가 그 두 사람을 연안에서 보았지요. 허정숙이 시집을 일곱 번이나 간 여자입니다.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첫 번째 남편이 이명곤이고, 최창익은 일곱 번째 남편이지요. 어느 책에 보면 이명곤을 최창익의 별명이라고 해 놓았던데 다른 사람입니다. 허정숙의 남편이라니까 같은 남자로 생각한 것 이지요."

 

즉 장건상의 기억 속에 허정숙은 중국에서 함께 활동한 동지라기보다 시집을 일곱 번이나 간 여자였다. 이렇듯 혁신계 인사로서 진보 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 진영의 남성조차 여성에 대한 편견과 가부장제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선으로 허정숙의 삶을 평가했다. 또한 허정숙이 결혼을 세 번밖에 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그의 왜곡된 기억은 당시 남성들이 실제로는 허정숙의 성과 정조관념에 얼마나 비판적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허정숙이 정조 관념이 희박한 여성으로 동지들의 기억 속에 남은 반면 허정숙과 마찬가지로 세 번의 결혼 생활을 했던 박헌영의 삶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이나 조소도 없었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주의 여성들의 성과 정조관념을 사회가 얼마나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드러낸다. 자유주의 신여성들의 자유연애가 그러했듯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붉은 연애 또한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로 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3.2. 가부장사회의 허락!

 

당시 가부장사회는 사회주의 신여성이 주장한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에 설득되거나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허정숙을 포함한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사생활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을 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유로 사회주의 신여성들이 자유주의 신여성들에 비해 사생활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일까? 앞서 살펴보았던 사회주의 신여성들에 대한 긍정 여론을 더욱 찬찬히 살펴보면 당시 사회는 그들의 문란한 성 생활을 눈 감아 주는 대신 그들에게 어떠한 사회적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여성 주체의 필요성이라는 당시 사회가 공유하고 있던 인식 안에서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의 실천이 용인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2장에서 허정숙이 자신의 문학과 사상과학 연구를 위해 모친에게 아들을 맡기고 떠날 때 사회에서 조선의 어머니와 딸들을 위하여 굳센 일꾼이 될 만한 힘과 길을 찾고 돌아오기를기대한다는 평판이 나왔다는 사례를 언급하였다. 여기서 허정숙을 향한 사회의 당부의 말에 주목해보자. 사회는 허정숙이 일꾼’, 즉 사회 운동의 주체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허정숙의 사생활을 두둔하는 글의 말미에는 항상 이것과 유사한 당부의 말이 포함되어있었다는 사실이다.

삼천리에 허정숙의 사생활을 변호하는 글을 기고한 초사 또한 허정숙의 성생활을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이야기한 뒤 그를 열잇고 성실하고 미모이고 그리고 체계있는 사상을 창달하게 기록할 수 있는 명석한 두뇌의 인, 필의 인, 설의 인 허정숙 여사는 조선 여류 사상계의 첫손가락에 꼽힐 빛나는 미래를 가진 여성이라고 평가했다. 제일선에 실렸던 허정숙을 향한 옹호의 글 문제인물의 문제 조선의 코론타이스트 허정숙에서도 필자는 허정숙의 이혼과 연애를 참견할 배 아니요라고 말하면서 그에 대한 지지를 보낸 뒤 허정숙이 조선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용감한 투사로서 걸어오던 걸음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며 글을 마무리했다. 이처럼 허정숙을 향한 긍정여론의 뒷단에는 항상 그가 그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여성 주체로 성장해주기를 바란다는 당부가 따라붙었다. 당시 조선 사회는 민족운동의 측면 혹은 경제 상황적 측면에서 여성들이 행위주체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했고 이를 이끌어 줄 여성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가부장사회는 사회주의 신여성들에게 자신들의 청사진 안에 포함되어 여성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해 달라는 당부를 보냈다. 그리고 이러한 당부의 말들 이면에는 허정숙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신여성들이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제 역할을 꾸준히 수행하겠다는 약속만 지켜준다면 문란해 보이는 그들의 성과 정조관념을 너그러이 사사로운 것으로 위치시켜줄 수 있다는 허락이 있었다. 여성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당시 가부장 사회가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문란한 성과 정조관념을 용인해 준 허락의 선이었던 것이다.

이 허락의 선 안에 들어있던 것은 압도적으로 자유주의 신여성들보다 사회주의 신여성에 가까웠으며 당시 사회는 그들의 청사진에 자유주의 진영 신여성들보다 사회주의 신여성들이 더욱 알맞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신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민족 독립, 교육, 의료 등 여러 측면에서 사회참여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과 반대로 자유주의 신여성들은 일부시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자유연애나 여성의 개성 표출과 같은 여성 개인의 문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모습은 당시 남성들이 원했던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성과 정조관념의 측면에서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주장이 가부장사회를 설득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진영 차이에서 비롯된 사회참여의 정도 차이가 그들의 생각이 갖는 설득력을 높여 준 요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들은 사회참여를 전제로 성과 정조관념 측면에서 보았을 때 문란하다고 여겨졌던 삶을 허락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회주의 신여성들은 계속해서 사회참여적인 태도를 지켰기 때문에 온전히 남성들이 그은 허락의 선 안에 머물 수 있었다.

이렇듯 자유주의 신여성들에 비해 사회주의 신여성들은 사회참여적인 측면에 있어 당시 남성사회가 그은 허락의 선 안에 드는데 적합했을 뿐 아니라 성과 정조 관념에 대한 본인들의 생각을 표출하는 데에 있어서도 당시 사회의 기대와 조응하는 양상을 보였다. 두 진영 신여성들의 여성운동 방식을 비교해보았을 때 사회주의 신여성의 운동 방식이 자유주의 신여성의 운동방식보다 훨씬 온건하였다. 자유연애와 사랑의 문제를 논설이나 수필 혹은 소설 등의 형태로 직접 사회에 제기했던 자유주의 신여성들과 달리 사회주의 신여성들은 개인의 차원에서 성과 정조문제에 대해 입장을 직접 표명하지 않았고 사생활 논란에 대해서도 굳이 스스로를 변호하려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신여성들은 진영에 따른 일반 입장에서의 의견 표명은 했을지언정 성과 연애의 문제를 공공의 차원에서 쟁점화 하는 데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가능하면 회피했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주의 신여성들이 성과 정조의 문제에 대한 의견공표에 매우 신중한 전략의 자세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식민지 사회의 현실과 여론을 고려해 볼 때 자신들의 의견이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 인식에서 성과 정조 문제에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소극적 방어 자세는 공공의 차원에서 직접 문제를 제기하고 실천한 급진주의 여성, 특히 나혜석의 입장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사회주의 신여성의 예시로 허정숙과 같은 사회주의 신여성 정칠성을 들 수 있다. 1929년 여름 정칠성은 콜론타이의 성도덕에 대한 의견을 묻는 삼천리지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다. 기자는 콜론타이의 붉은 연애에서 자신은 처녀가 아니라고 애인의 사랑을 물리치는 주인공 바실리사에게 사내가 옛날 애인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일이라고 말하며 결혼한다는 대목을 언급하면서, 우리의 경우에도 순결성을 문제로 삼아야 하느냐고 질문한다. 이 질문에 정칠성은 대답하기 조금 거북하다는 말로 답변을 회피한다. 이러한 회피는 말을 한 대야 아직 우리 조선 사회가 용납하여 주지 않을것이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또한 아내가 된 바실리사가 별거하다가 몇 달 만에 돌아오니 남편이 간호부와 성관계를 가졌는데도 이를 용서하는 장면에 대한 의견을 묻는 대목에서도 그는 역시 조선 사회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직접적인 의견을 표출하는 것을 꺼리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같은 잡지 안에서 기획된 명사의 멘탈 테스트라는 기사에서도 정칠성은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여기에서 기자는 삼강오륜에 대한 정칠성의 비판을 기대하며 그의 의견을 묻지만 그녀는 답변을 피한다. 이에 기자는 콜론타이가 자신의 소설에서 여자의 처녀성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고 서술한 것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묻는데 정칠성은 이에 대해서도 그런 건 난 모른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를 거부한다. 아내가 없는 동안 남편이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져도 그것이 생리적 불가항력의 일이라는 점에서 용서해야 하냐는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도 그는 생리의 불가항력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옳고 그른 것의 여부는 자신이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주의 신여성의 태도는 허정숙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사회주의 신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허정숙이 성과 정조관념에 대해 남긴 글은 별로 없으며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유주의 신여성인 나혜석, 김일엽 등이 많은 글들을 남긴 것과 비교했을 때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이다. 심지어 허정숙은 송봉우와의 염문설을 피해 미국으로 갈 때도 무거운 머리와 수습할 수 업는 혼탁한 정신을 가지고 여정에 올은 거시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조선이 동요 상태이며 일본 내 조선사회가 혼란에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즉 유학을 가는 것이 임원근과의 이혼이나 송봉우와의 동거 등으로 인한 사회적인 논란 때문인 것은 아니라고 간접적으로 부인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나혜석이나 김일엽과는 달리 개인적인 사생활을 언론에 언급한 적이 없었다.

남편이 옥중에 있을 때 아내의 수절문제에 대해서도 허정숙은 어느 정도 남성사회의 기대에 조응하는 주장을 펼쳤다. 허정숙은 전남편 송봉우의 비판을 의식이라도 하듯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고 강조하면서도 주장 말미에는 당시 가부장사회의 시선과 일치하는 언급을 덧붙였다. 그는 이 문제는 벌써 몇 해 전부터 조선 사회에 제출되어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라고 언급하면서 앞으로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증가함에 따라 더욱 복잡다단할 문제가 될 것으로 진단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외국의 여성들과 달리 조선 여성이 처해 있는 현실 조건에 주목할 것을 촉구했다. 전체적으로 교양이 낮고 경제 결핍으로 고통 받는 조선의 여성은 남편이 망명해 있거나 감옥에있는 상황에서 조선 현실이 강요하는 호구난에 몰려개가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배우자의 시련 중에 아내가 수절해야한다는 것을 그가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즉 이상으로는 아내 된 사람이 언제까지든지 즉 재회할 때까지 수절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경제 관계나 성 관계 등으로 그것을 실행하기가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허정숙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신여성들은 나혜석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신여성들에 비해 당시 가부장사회가 필요로 했던 근대의 여성주체 상에 더욱 부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온건한 의견 표출 태도를 보이면서 당시 사회의 기대와 조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주의 신여성과 사회주의 신여성 사이의 차이는 앞서 확인한 것과 같이 두 부류의 신여성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 차이로 이어졌다. 결국 당시 조선 사회가 신여성의 삶과 주장을 평가하고 수용한 기준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지식인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신여성들의 주장과 삶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배척당했다.

 

4. 닫는 말

 

1920년대 조선 사회에 등장한 신여성들은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을 주장하며 당시 사회에 매우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 중에서도 글과 그림을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자유연애론과 정조 관념을 설파한 나혜석과 조선의 콜론타이라 불리며 붉은 연애를 표방한 허정숙의 삶은 그들이 주장한 자유로운 성과 정조 관념 그 자체였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결혼 전 자유연애를 실천하며 정조를 지키는 것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자유 이혼을 통해 정절이라는 가치에 도전하였다. 이렇듯 나혜석과 허정숙의 삶은 둘 다 당시 사회에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상이하게 갈렸다. 사회의 무조건적인 비판을 받아야했던 나혜석의 행로와 달리 허정숙의 삶은 때때로 사회의 지지와 옹호를 받았다. 이렇게 두 사람을 향한 사회의 반응이 달랐던 것은 허정숙의 성과 정조관념이 나혜석의 것과 달리 당시 사회를 설득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회가 나혜석과 달리 허정숙의 삶을 옹호하고 지지하였던 것은 자유주의 신여성들과 달리 사회주의 신여성들이 당시 사회가 여성들에게 기대했던 여성 지도자로서의 역할에 더욱 부합하였기 때문이었고, 따라서 허정숙이 그 기대에 부응해주는 대신 사회가 허정숙의 문란한 사생활을 허락한 결과였다. 또한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성과 정조관념에 대한 의견은 자유주의 신여성들의 의견보다 훨씬 온건하게 사회에 전달되면서 가부장사회의 기대와 조응하였다.

이 논문에서 다루는 가부장사회는 단순히 당시 여론의 형성을 주도하던 남성들만을 국한시켜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가부장사회는 수절과 정조를 강조하던 성과 정조관념에 매몰되어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을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회전체를 지칭한다. 나혜석의 급진적인 성과 정조관념이 여성들로부터도 응원 받지 못했던 점, 나혜석이 가족들에게서 조차 외면 받았던 점, 그리고 두 인물들에 대한 글이 실렸던 잡지들이 당대에 유행하여 널리 읽혔던 대중잡지였다는 점은 여성들과 일반인들조차 가부장사회의 남성중심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허정숙에 대한 동조 여론이나 비난 여론의 발화 주체들이 글을 통해 보여준 태도가 한 진영에 속해 있는 지식인의 모습보다도 가부장적인 남성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렇듯 남성중심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었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가부장사회가 두 신여성 나혜석과 허정숙을 향해 보인 태도의 차이는 당시 사회가 여성들에게 기대하고 있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기대가 당시 여성들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당시 조선 사회가 나혜석에게 보인 비판적 태도는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즉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은 페미니즘을 향한 남성중심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사회의 폭력적인 분위기에 둘러싸였던 나혜석은 결국 그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한 체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하였다. 동시에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의 실천을 허락받았던 허정숙의 삶을 통해 우리는 가부장사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신여성들이 주장했던 자유로운 성과 정조관념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해주는 사회주의 신여성들의 사생활을 눈 감아 주는 표리부동한 태도를 보였다. 이렇듯 모순되고 폭력적인 남성중심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었던 가부장사회 속에서 당시 신여성들이 이야기하던 급진적인 주장들의 가치가 제대로 발휘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신여성 등장 이후 약 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남성중심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 리더가 되어달라는 기대를 받으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지만 당차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면 기가 세다고 쓴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내조 잘하는 아내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강요받지만 능력 있는 며느리라면 요리 못하는 정도는 괜찮다고 용서받는다. 이렇게 많은 나혜석들과 허정숙들이 여전히 남성중심이데올로기가 그은 허락의 선 위를 표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21세기 한국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분명 이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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