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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 아무 글 : 14. 잘하는 게 뭐야?

응_그래 2017. 9. 23. 18:12

가끔은 정곡을 찔렀던 대화 속 몇 개의 문장때문에 그 대화를 진솔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곰곰히 짚어보면 사실 대부분의 대화는 그 몇 문장 빼고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곧 내 머릿 속에서는 그 문장이 대화의 전부가 되고 나는 그 문장을 며칠이고 곱씹는다. 소화되지도 않은 말들이 무엇으로 배출되지도 못한 체 내 머리를 부유하다 사라지고나면 나는 아무 영양분없이 무기력하다.


못 하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잘하는 것도 없는 사람. 싫어하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엄청 좋아하는 것도 없는 사람.

늘 무언가를 찾고 싶어했다. 내가 정말 잘 하는 것,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것. 무언가 하나에 몰두하고 끈질긴 사람들을 선망해서 그런지 몰라도 내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고 그러다보니 그런 걸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게 당연해보였다. 나는 그러지 못한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래서 스스로를 문제처럼 여겼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내가 세상을 완전히 누리며 살고 있지 못한다는 불안감으로 자랐다. 겉잡을 수 없이 커진 마음은 나를 매사에 매달리지만 결국엔 너무 많은 것에 매달리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이 생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그냥 나는 이것 저것 새로운 것을 하며 행복해하는 사람이라는 걸, 한 분야에 몰두하지는 못해도 내가 머무는 한 순간에는 흠뻑 젖어드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내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아끼는 나의 모습들을 갖춰올 수 있었다는 걸. 지나온 시간들을 헤집다보니 조금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요새 다시금 나의 부러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도 가지고 싶다. 나도 남들 다 가지고 있는 거 하나쯤은 가지고 싶다, 그런 부러움. 

함께 일하는 분이, 아직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지나가는 말을 뱉었다. 그 말은 곧 그 대화의 전부가 됐고 그 이후로도 며칠간 내 머리를 가득 채워버렸다. 나는 맡은 일을 잘 해내보겠다고 마음 먹은 직장에서 조차 같은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못 하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잘하는 것도 없는 사람. 싫어하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엄청 좋아하는 것도 없는 사람.
하나를 깊게 파고 들여다보는 사람. 그 하나에 대한 애정이 실력으로까지 이어지는 사람.

생겨먹은 대로의 나와 되고 싶은 모습의 나 사이의 굴레. 언제쯤 벗어날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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